두 번째 핏자국 어느 해 가을, 화요일 아침이었다. 유럽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알 만큼 유명한 두 사람이 베이커 가에 있는 우리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높은 코에 매서운 눈매를 지녔고 언뜻 보기에도 위엄이 느껴지는 인물로, 영국 수상을 연임하고 있는 유명한 벨린저 경이었다. 또 한 사람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신사로 건강한 체격에 정신적인 미덕까지 고루 갖춘 사람처럼 보였다. 아직 중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 점잖은 신사의 이름은 트렐로니 호프였는데, 현직 우파 의원이자 외교부 장관으로 영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벨린저 경과 호프 장관은 신문으로 어질러져 있는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들의 핼쑥하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봐서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벨린저 경은 푸른 혈관이 드러나 보이는 가느다란 손으로 우산의 상아 손잡이를 움켜쥔 채 나와 홈즈를 번갈아 보았는데, 꽤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 옆에 앉은 호프 장관은 초조한 듯 콧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시곗줄에 매달려 있는 도장들을 만지작거리기도 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홈즈 씨, 편지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건 오늘 아침 8시였소. 즉시 수상에게 보고했더니, 홈즈 씨에게 사건을 의뢰하자고 제안하셨소.” “경찰에는 알렸나요?” “아니요. 아직 알리지 않았고, 알릴 수도 없소. 경찰에 알리게 되면 국민들이 알게 될 거요. 우리는 이 사건을 국민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소.” 벨린저 경이 신속하고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그렇습니까?” “잃어버린 편지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알려진다면 유럽의 국제관계가 위태로워질 가망성이 크오.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문제가 그 편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요. 그 편지를 아무도 모르게 되찾을 수 없다면, 차라리 찾지 않는 편이 낫소. 편지를 훔쳐간 자들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 편지의 내용이 알려지는 것이기 때문이오.” “알겠습니다. 호프 장관님, 편지가 분실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홈즈 씨, 사실 별로 설명할 내용이 없소. 그 편지는 외국의 어느 국왕이 엿새 전에 보내온 것이오. 워낙 중요한 편지라서 낮에는 사무실 금고에 넣어 두고 매일 저녁마다 화이트홀 테라스에 있는 집으로 가져가서 침실의 문서 보관함에 넣고 열쇠로 잠갔소. 어제 저녁에도 편지가 문서함 속에 있었소. 그 점에 대해선 확신할 수 있소. 저녁 식사를 하려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문서함을 열고 편지가 있는지 확인했으니 말이오. 그런데 아침에 감쪽같이 편지가 사라졌소. 문서함은 어젯밤 내내 화장대 거울 옆에 있었소. 나는 잠귀가 밝은 편이고 아내도 그렇소. 밤새 누군가 침실에 들어왔다면 우리 부부가 몰랐을 리가 없소.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아침에 보니 편지가 사라진 거요.” “저녁 식사는 몇 시에 하셨나요?” “7시 반이오.” “얼마 후에 잠자리에 드셨죠?” “아내가 극장에 갔기 때문에 나는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소. 우리가 침실에 들어간 시간은 11시 반쯤일 거요.” “그러면 문서함이 네 시간 정도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말이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소. 우리 부부 외에는 아무도 침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소. 물론 아침에는 가정부가 드나들고 낮에는 내 하인과 아내의 하녀가 드나들긴 하지만, 밤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오. 세 사람 모두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일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오. 게다가 그들은 문서함 안에 일반적인 외교부 서류들보다 더 중요한 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소.” “그 편지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은 누가 있나요?”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모르오.” “부인은 알고 계셨겠지요?” “아니요. 모르고 있었소. 오늘 아침 그 편지가 없어진 걸 알았을 때까지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호프 장관의 대답에, 벨린저 경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프 장관, 당신이 공무에 임하는 강한 책임감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네. 나 역시 이렇게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밀은 아무리 가까운 부부 사이라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호프 장관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게 인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편지가 없어지기 전까지 아내에게 그 편지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인이 그 편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요, 홈즈 씨. 아내는 짐작할 수 없었을 거요. 아내뿐만 아니라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전에도 서류를 잃어버린 적이 있나요?” “한 번도 없었소.” “영국에서 그 편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어제 내각회의에서 각부 장관들에게 알려주었소. 그 편지에 관해서 수상께서 특별히 비밀을 지키도록 당부하셨지요. 그런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 편지를 잃어버렸으니…….” 호프 장관의 남자다운 얼굴은 갑작스레 북받쳐 오르는 절망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장관들 외에 관계부서에서 알고 있는 관리도 두셋 있을 거요. 이 외에는 영국에서 그 편지에 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확실하오.” “그러면 외국에서는 어떻습니까?” “외국에서 그 편지를 본 사람은 편지를 쓴 본인뿐이라고 생각하오. 편지가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전해지지 않은 걸로 봐서 틀림없이 그쪽 장관들도 몰랐을 거요.” 홈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편지에 대체 무슨 내용이 들었습니까? 왜 그 편지를 분실하면 중대한 결과가 벌어지는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수상과 장관은 재빨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수상은 난처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홈즈 씨, 그 편지의 봉투는 길고 얇으며 옅은 푸른색이오. 붉은 밀랍으로 봉해져 있고, 그 위에는 웅크린 사자 모양의 도장이 찍혀 있소. 주소는 커다랗고 획이 굵은 필적으로…….” 홈즈가 말을 가로막았다. “물론 그런 자세한 부분에도 흥미가 있고, 실제로도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이긴 합니다. 하지만 제 질문은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전 그 편지의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홈즈 씨, 그건 아주 중요한 국가 기밀에 속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어요. 제 생각엔 굳이 그걸 알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익히 들어온 홈즈 씨의 명성대로 지금 설명한 것과 같은 봉투를 찾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신 만큼 저희가 최대한 사례하겠소.” 홈즈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두 분이 영국에서 가장 바쁜 분들이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나름대로 맡고 있는 사건이 많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 사건은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얘기가 더 길어진다 해도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벨린저 경은 벌떡 일어서서 장관들까지 쩔쩔 매게 만드는 그 무서운 눈초리로 홈즈를 바라보았다. “홈즈 씨, 이런 무례한 일을 당하긴 처음이오.” 벨린저 경은 화를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어깨를 으쓱했다. “좋소, 홈즈 씨. 당신의 요구대로 편지 내용을 말하겠소. 당신 말이 옳소.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당신에게 사건을 의뢰할 수 있겠소.” “옳은 말씀입니다.” 호프 장관이 말했다. “그럼 당신과 왓슨 박사를 믿고 얘기하겠소. 이 편지의 내용이 새어나가면 우리나라에 큰 재난이 닥칠 테니 두 분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밀을 지켜주시오.” “저희들을 믿으셔도 됩니다.” “그 편지는 최근에 영국이 펼치고 있는 식민지 확장 정책에 분개한 한 외국의 국왕이 보낸 것이오. 하지만 국왕이 독단적으로 한때의 감정에 치우쳐 쓴 모양이오. 조사해 보니, 그 나라의 장관들도 그 편지에 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소. 편지에는 전체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용어가 섞여 있고, 특히 몇몇 구절은 매우 도발적이어서 만일 편지 내용이 알려지면 영국의 국민감정을 자극하여 무시무시한 사태가 일어날 게 불 보듯 뻔하오. 여론이 들끓게 되면 며칠 안에 우리나라는 분명 큰 전쟁에 휘말리게 될 거요.” 홈즈는 종이에 이름을 적어 벨린저 경에게 내밀었다. “맞소. 그 사람이 편지를 쓴 분이오. 편지 내용이 알려지면 전쟁 비용으로 수백만 달러가 들 것이고, 수십만의 인명을 앗아갈 수도 있소. 그런 편지가 이렇게 감쪽같이 없어졌으니…….” “편지를 보낸 국왕에게도 그 편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렸나요?” “암호로 전보를 쳐서 바로 알렸소.” “그 국왕은 그 편지가 공표되기를 바라고 있겠죠?” “그건 아니요. 편지를 보낸 국왕도 자신이 경솔하게 처신했던 점을 후회하고 있을 게 분명하오. 편지의 내용이 알려지면 국왕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도 큰 타격을 입게 될 테니까 말이오.” “그렇다면 편지가 발표될 경우 누가 이익을 보는 겁니까? 편지를 훔쳐간 사람은 왜 그것을 공표하고 싶어 할까요?” “그건 말이오, 홈즈 씨. 복잡한 국제 정치에 대한 문제라오. 유럽의 현 상황을 생각해 보면 당신도 그 동기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거요. 전 유럽에서는 무장한 군인들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고 있소. 현재는 두 군사동맹 의 군사력이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소. 하지만 영국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대세가 기울게 되오. 만일 영국이 한쪽 동맹과 전쟁을 벌인다면 다른 동맹이 우세해지지 않겠소? 전쟁에 합류하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오. 아시겠소?” “잘 알겠습니다. 그럼 그 편지를 입수하여 발표하면 편지를 보낸 국왕의 적국들에게 이익이 되겠군요. 우리나라와 국왕의 나라 사이가 안 좋아질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소.” “그 편지가 적국의 손에 넘어간다면 누구에게 보낼 거라고 생각합니까?” “유럽의 수상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을 거요. 지금 현재 가장 신속한 방법으로 누구에겐가 보내지고 있을 것이오.” 호프 장관은 머리를 떨어뜨리고 큰 신음 소리를 냈다. 벨린저 경은 위로하듯 장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운이 나빴던 것뿐이오, 호프 장관. 아무도 당신을 비난할 순 없소. 당신은 최선을 다했소. 홈즈 씨,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의 전부요.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홈즈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편지를 찾지 못한다면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그렇다면 전쟁 준비를 할 수밖에 없겠군요.” “홈즈 씨, 그런 희망 없는 말을 하다니…….”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밤 11시 반부터 다음 날 아침 편지가 없어진 걸 발견할 때까지 호프 장관과 부인이 방 안에 계셨으니, 그 시간에 편지를 도둑맞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둑맞은 시간은 저녁 7시 반에서 11시 반 사이가 됩니다. 편지를 가져간 범인은 편지가 침실 안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되도록 빨리 편지를 손에 넣고 싶었을 테니까 아마 7시 반에 가까운 시간이었을 거라는 추리가 가능합니다. 그 중요한 편지를 어제 저녁 8시나 9시쯤에 누군가가 훔쳤다면 지금은 그 편지가 어디에 있을까요? 범인이 누구이건 그 편지를 갖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편지를 곧장 필요한 사람에게 보냈을 겁니다. 그렇다면 편지가 적국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찾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조차도 가망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벨린저 경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신 말대로요, 홈즈 씨. 나도 이제 와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말입니다. 하녀나 하인들 중 한 명이 편지를 훔쳐갔다고 가정해 보죠.” “저희 집 하인들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장관님 침실은 3층에 있고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밖에 없는 데다, 거기로 들어가려면 사람들의 눈에 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집안사람 중 한 명이 그 편지를 훔친 게 틀림없습니다. 범인은 그 편지를 누구에게 가져갔을까요? 국제 스파이에게 가져갔을 확률이 크겠죠? 저는 그런 자들의 이름을 환히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주요 인물이 셋 있지요. 세 명 모두 아직 살던 곳에 그대로 있는지 가서 직접 알아보는 걸로 수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만일 그들 중 한 명이 어제 저녁부터 자취를 감추었다면, 편지가 그의 손에 넘어갔다는 얘기겠죠.” “하지만 자취를 감출 필요가 있겠소? 런던에 있는 자기네 대사관으로 가져가면 될 텐데요.” 호프 장관이 물었다.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원래 스파이들이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데다, 자기네 대사관과 관계가 나쁜 경우가 많거든요.” 벨린저 경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홈즈 씨, 당신 말이 맞소. 그 편지가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 고려한다면 스파이가 직접 본부에 전할 가능성이 크오. 홈즈 씨, 당신의 추리력은 정말 놀랍소. 그건 그렇고 호프 장관, 이 사건 때문에 우리의 다른 직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않겠소? 홈즈 씨, 우리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에게 알릴 테니, 당신도 수사 상황을 우리에게 꼭 알려주시오.” 벨린저 경과 호프 장관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엄숙한 태도로 방에서 나갔다. 두 유명한 정치인이 방에서 나가자, 홈즈는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조간을 펼쳐 들고 어제 저녁 런던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범죄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홈즈가 탄성을 지르더니 벌떡 일어나 담배 파이프를 벽난로 위에 놓았다. “바로 그거야. 그게 사건에 접근하는 최상의 방법이지. 상황이 급박하긴 해도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지금이라도 그 세 사람 중 누가 그 편지를 훔쳤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아직 그 범인이 편지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그럴 경우 결국은 돈 문제란 얘긴데, 우리 뒤에는 영국 재무부가 버티고 있잖나? 팔려고 내놓으면, 그걸 사들이면 돼. 우리가 세금을 몇 푼 더 내더라도 말일세. 그리고 범인이 그 편지를 외국에 팔기 전에 우리나라 측과 흥정을 해보려고 그냥 갖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런 대담한 짓을 벌일 수 있는 놈은 셋밖에 없지. 오버스타인, 라 로티에르, 에두아르도 루카스. 한 명씩 다 만나봐야겠군.” 나는 읽고 있던 조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말한 에두아르도 루카스는 고돌핀 가에 사나?” “그래.” “그럼 자네가 찾아가도 만나지 못하겠는데.” “무슨 말이야?” “그는 어제 저녁에 자기 집에서 살해되었어.” 홈즈 곁에서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지금껏 그는 늘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이번엔 내가 홈즈를 깜짝 놀라게 했다는 사실에 순간 기쁨이 밀려들었다. 홈즈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들고 있던 신문을 가로챘다.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웨스트민스터의 살인 어제 저녁 고돌핀 가 16에서 이상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곳은 템스강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사이에 18세기 양식의 고풍스런 집들이 모여 있는 인적이 드문 동네로, 국회의사당 건물의 대형 시계탑 가까이 있다. 에두아르도 루카스 씨는 몇 년 전부터 이곳에 있는 아담한 고급스러운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훌륭한 성품과 뛰어난 아마추어 테너 가수라는 명성으로 사교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루카스 씨는 34세의 독신으로, 집에는 나이 많은 가정부 프링글 부인과 그의 시중을 드는 하인 미턴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프링글 부인은 어제도 평소와 다름없이 제일 위층에 있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미턴은 어제 저녁 해머스미스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외출했다. 따라서 밤 10시 이후에 집 안에서 깨어 있던 사람은 루카스 씨뿐이었다. 밤 10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11시 45분경 고돌핀 가를 순찰하던 배렛 순경이 루카스 씨 집의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노크를 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들어가 노크했으나 역시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순경은 방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 보았는데, 방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가구는 모두 한쪽으로 밀쳐져 있었고, 방 가운데에는 의자 하나가 넘어져 있었으며, 루카스 씨는 그 의자의 다리 하나를 쥔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심장 부위를 찔려 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범행에 사용된 칼은 칼날이 휜 인도식 단검으로 방 안에 장식해 두었던 동양의 무기류 중 하나를 집어든 것으로 보인다. 방 안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훔쳐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범행 동기가 단순 절도는 아닌 듯하다. 루카스 씨는 유명한 데다 평판도 좋았기 때문에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많은 친구들이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홈즈는 오랜 침묵을 깨고 나에게 물었다. “왓슨,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나?” “놀라운 우연의 일치인 것 같군.” “우연의 일치일까? 편지를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는 세 명의 스파이 중 한 명이, 범인이 편지를 훔치고 있을 바로 그 시간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어. 우연의 일치가 아닐 가능성이 크지 않나? 그럴 확률이 얼마인지 정확한 수치로 나타낼 순 없지만 말이야. 왓슨, 이 두 사건은 분명히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네.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내는 게 우리가 할 일이지.” “그렇지만 지금쯤은 경찰도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 루카스의 살인 사건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만, 편지가 도난당한 사건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어. 물론 알려서도 안 되지. 두 사건을 모두 알고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는 사람도 우리뿐이야. 나는 편지를 훔친 범인으로 루카스를 가장 의심하고 있었어. 물론 거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네. 루카스가 살고 있던 고돌핀 가에서 호프 장관의 집이 있는 화이트 테라스 홀까지는 걸어서 몇 분 거리야. 하지만 내가 이름을 말한 다른 두 명의 스파이는 웨스트엔드에서도 끝 지역에 살아. 그러니까 루카스가 다른 두 스파이들보다는 호프 장관의 집안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정보를 얻어듣기가 쉽다는 얘기네. 물론 이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문제일 거야. 하지만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두 집에서 두세 시간 사이에 연달아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때 허드슨 부인이 쟁반에 명함 한 장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왓슨, 누가 찾아온 것 같군.” 홈즈는 명함을 들여다보더니 눈을 치켜뜨고 나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힐다 트렐로니 호프 부인에게 올라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조금 전에는 유명한 정치가가 두 명 다녀가더니, 이번에는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우리의 누추한 방을 방문했다. 벨민스터 경의 막내딸인 호프 부인의 미모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 어떤 설명이나 내가 보았던 어떤 흑백사진도 눈앞에서 직접 만나본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우아한 자태에 아름다운 용모, 거기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피부색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을 더욱 끈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호프 부인이 우리 방문 앞에 모습을 보인 그 잠시 동안,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녀가 느끼고 있는 공포였다. 그녀는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런지 안색이 창백하고 눈에는 열기가 이글거렸지만, 그런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홈즈 씨, 남편이 여기에 다녀갔나요?” “네, 다녀가셨습니다.” “홈즈 씨, 부탁입니다만 제가 여기에 온 걸 제 남편에게 비밀로 해주세요.” 홈즈는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제 처지가 난처하군요. 일단 앉아서 용건을 말씀하세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 호프 부인은 방을 가로질러 가더니 창문을 등지고 앉았다. 큰 키에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은 가히 여왕 같은 자태였다. 부인은 하얀 장갑을 낀 두 손을 깍지 낀 채 양손을 꼭 쥐었다 폈다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홈즈 씨. 사실대로 말씀드릴 테니, 당신도 솔직히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남편과 저 사이에는 한 가지 문제를 빼고는 비밀이 없어요. 그 한 가지가 바로 정치에 관한 문제입니다. 남편은 정치에 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저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아요. 저는 어젯밤 저희 집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어떤 편지가 없어졌죠. 하지만 그 일이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남편은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게 있어요. 저는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야만 해요. 정치가들을 제외하고 진상을 알고 계시는 분은 당신들뿐입니다. 홈즈 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모두 다 말씀해 주세요. 제 남편을 위해 비밀을 지킨다는 생각은 거두어주세요. 제가 그 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제 남편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도난당한 편지는 어떤 것이었나요?” “부인,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호프 부인은 괴로운 듯 신음 소리를 내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부인, 이해하셔야 합니다. 남편 분은 이 사건에 대해 부인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저는 탐정으로서 고객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한 뒤 사건의 진상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 역시 남편 분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한테 물어보시는 건 적절한 일이 아니군요. 남편 분께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물어보았지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이제 물어볼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거예요. 홈즈 씨, 사건의 진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해도 한 가지만은 말해 줄 수 있죠?” “부인, 그게 무엇인가요?” “이 사건 때문에 남편의 정치적 경력에 오점이 남을 수도 있나요?” “그렇습니다, 부인. 게다가 이 사건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대단히 불행한 사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오! 이런 일이!” 부인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홈즈 씨, 하나만 더 묻겠어요. 이번 사건이 생긴 후에 남편이 무심코 흘린 말로는, 그 편지를 찾지 못하면 사회에 무서운 영향을 끼칠 거라고 했어요. 그게 사실입니까?” “남편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저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체 그 영향이란 것은 어떤 종류입니까?” “부인,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물어보시는군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시간을 빼앗지 않겠어요.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당신 입장에서 보면 남편의 뜻을 따르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캐묻는 저를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저는 남편의 걱정을 나누고 싶을 뿐이니까요.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만, 제가 여기에 찾아온 건 비밀로 해주세요.” 부인은 문 앞에서 우리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 덕분에 나는 아름답긴 하지만, 고통에 사로잡혀 일그러진 얼굴과 놀란 눈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부인은 방에서 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치맛자락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홈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왓슨, 아름다운 여성은 자네 분야지? 저 아름다운 여인의 속셈이 뭘까? 진짜 원하 는 게 뭘까?” “자기 입으로 말했다시피 걱정하는 거야. 이런 상황이라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왓슨, 부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봐.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끈질기게 질문을 계속했지? 게다가 부인이 감정을 쉽게 나타내지 않는 상류사회 출신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확실히 몹시 당황한 것처럼 보이긴 했어.” “또 하나 이상한 점이 있어. 호프 부인은 자신이 그 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것이 남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어.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지? 자네도 눈치챘겠지만 부인은 일부러 빛을 등지고 앉았어. 그건 우리에게 자신의 얼굴 표정을 읽히지 않기 위해서였을 거야.” “그건 나도 알아챘어. 방에 있는 많은 의자 중에 빛을 등지고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골라 앉더군.” “하지만 여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왓슨, 내가 빛을 일부러 등지고 앉았다고 의심했던 마게이트의 그 여자 기억나나? 코에 분을 바르지 않아서 그걸 숨기려고 그랬던 걸로 밝혀졌지. 확실하지 않은 사실로 추리를 할 순 없어. 여자들은 평범한 행동에 깊은 뜻을 숨기기도 하고, 정말 이상해 보이는 행동에 아무런 뜻이 없는 경우도 많아. 단순히 머리핀이나 분칠을 서툴게 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럼 나중에 봐, 왓슨.” “어딜 가려고?” “고돌핀 가에 가서 런던 경찰청 친구들과 오전 시간을 보낼 거야. 에두아르도 루카스가 이번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해. 사실을 알아내기 전에 추리를 했다가는 큰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까. 왓슨, 자네는 집에 있다가 손님이 오면 만나주게. 점심때까지는 돌아올 거야.”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홈즈는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말이 없는 상태,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상당히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다. 홈즈는 집에서 뛰쳐나갔다가 들어와서는 줄담배를 피우고, 바이올린을 켜고, 생각에 잠겼다가 아무 때나 샌드위치를 먹고, 내가 물어보는 일상적인 질문에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분명히 수사가 잘 진행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홈즈가 사건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아서, 나는 신문 기사를 통해 배심원들의 신문 내용과 루카스의 하인 존 미턴이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난 사실들을 알았을 뿐이다. 배심원들은 루카스의 죽음을 고의적 타살로 판결 내렸지만, 범인에 대해서는 아 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범행 동기도 밝혀내지 못했다. 방에는 값나가는 물건이 많이 있었는데 범인은 전혀 손대지 않았고, 피해자의 서류를 뒤진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서류를 조사해 본 결과, 루카스가 국제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남의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자주 편지를 쓰며, 여러 나라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몇몇 나라의 고위 정치가들과는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는데, 서랍 속에 가득한 서류들 중에서 특별해 보이는 건 발견되지 않았다. 만나는 여자들은 많았으나 깊은 관계는 없어 보였고, 특별히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며, 누구한테 특별히 원한을 살 만한 짓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경찰에서는 어떤 이유로 피살되었는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고, 사건이 해결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존 미턴을 체포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경찰의 판단 아래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고, 그에게 불리한 단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날 밤 미턴은 해머스미스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었고, 알리바이도 확실했다. 그가 집을 나섰다가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한 시간은 범행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술에 따르면 거기서부터 걸어왔기 때문에 밤늦게나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미턴이 집에 도착한 시각은 밤 12시였으며, 루카스가 피살된 것을 발견하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미턴은 평소에 주인 루카스와 사이가 좋았다. 면도기를 포함한 루카스의 물건 몇 개가 미턴의 상자에서 발견되었는데 미턴의 설명으로는 그건 루카스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했고, 가정부도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언했다. 미턴은 루카스 집에서 3년 정도 일했다. 눈길을 끄는 사실은 루카스가 다른 나라에 갈 때 미턴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카스는 때때로 석 달 정도 파리에 머물기도 했는데, 그동안에도 미턴은 남아서 집을 관리했다. 가정부는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누군가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루카스가 직접 맞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내가 신문을 통해 주워들은 바로는, 사건이 일어난 지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이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홈즈가 신문 기사에 나온 사실들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으로부터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일이 보고받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봐서는, 수사의 진행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나흘째 되는 날, 파리에서 발송한 전보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그 기사의 내용으로는 사건이 완전히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파리 경찰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함에 따라, 지난 월요일 밤 웨스트민스터의 고돌핀 가에서 일어난 에두아르도 루카스 살해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지 금까지의 수사 진행 상황을 보면 루카스가 그의 방에서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고, 그의 하인 미턴이 범인으로 의심받았지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수사가 미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어제 파리 오스테를리츠에 사는 앙리 푸르네이 부인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하인들이 신고했다. 곧바로 진찰한 결과, 푸르네이 부인은 심각한 상태의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푸르네이 부인은 지난 화요일에 런던에서 돌아왔으며, 루카스 살해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발견한 사진을 대조해 본 결과 푸르네이 부인의 남편 앙리 푸르네이와 에두아르도 루카스가 동일인물이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루카스는 런던과 파리에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푸르네이 부인은 스페인 혈통으로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며, 이전에도 질투심 때문에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런던을 떠들썩하게 했던 루카스 살해 사건도 부인의 이런 질투심 때문에 저질러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이 있었던 월요일 밤에 부인이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화요일 아침에 부인과 인상이 일치하는 여자가 채링크로스 역에서 몹시 흥분한 모습으로 미친 사람 같은 행동을 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끈 일이 있었다. 따라서 푸르네이 부인이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루카스를 죽였거나, 루카스를 죽인 충격으로 실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로서는 푸르네이 부인이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치에 맞는 설명을 해줄 수 없는 상태이며, 의사는 부인이 제정신을 차릴 가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월요일 밤 고돌핀 가에 있는 루카스의 집을 한 여자가 지켜보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도 있는데, 그 여자가 바로 푸르네이 부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홈즈가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내가 기사 내용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홈즈, 이 기사를 어떻게 생각하나?” 홈즈는 식탁에서 일어서더니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왓슨, 자네가 오랫동안 참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내가 지난 사흘 동안 사건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건 실제로 별로 말할 거리가 없어서야. 지금 파리에서 온 이 기사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 “그래도 루카스의 살인에 대해선 수사가 마무리된 게 아닌가?” “사실 우리가 맡은 사건과 비교해 봤을 때 루카스의 죽음은 사소한 사건에 불과해.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없어진 편지를 찾아서 유럽에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는 거야. 여기서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게 하나 있다네. 지난 사흘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 정부로부터 거의 한 시간마다 보고를 받았는데, 유럽 어디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편지를 훔친 사람이 이미 그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면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을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편지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는 얘긴데, 그럼 그 편지가 어디 있을까? 누가 갖고 있을까? 왜 편지를 그냥 갖고 있는 걸까? 내 머릿속은 이런 문제들로 가득 차 있어. 편지가 없어진 날 밤 루카스가 살해된 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편지가 과연 그의 손에 들어갔을까? 그럼 왜 그의 서류 속에 편지가 없을까? 그렇다면 정신 나간 푸르네이 부인이 갖고 갔을까? 그래서 파리에 있는 부인의 집에 있는 걸까? 프랑스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푸르네이 부인 집을 수색할 방법은 없을까? 왓슨, 이번 사건에서는 범죄자에게 법이 위험한 것만큼 우리에게도 법이 위험한 존재야. 자네도 알다시피 이 사건은 절대 법적인 문제로 불거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 아무도 우릴 도와줄 수 없지만, 이 사건에 걸려 있는 이익은 정말 어마어마해. 내가 이 사건을 잘 해결한다면 내 경력에 더 없는 명예가 될 거야. 아, 무슨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 모양이군.” 홈즈는 허드슨 부인에게 건네받은 쪽지를 훑어보았다. “왓슨,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 모양이야. 자네도 모자를 쓰 게. 웨스트민스터의 사건 현장으로 함께 가보자고.” 나는 이번 사건의 범행 현장에는 처음 가는 것이었다. 루카스의 집은 높고 폭이 좁았다. 지은 지 족히 100년은 되어 보이는 구식 건물로, 색은 좀 어두웠지만 깨끗하고 튼튼해 보였다. 불도그처럼 생긴 레스트레이드가 창문 너머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체격이 큰 경관이 현관문을 열자, 레스트레이드가 나와서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범행이 일어났던 방으로 안내되었다. 하지만 방에는 카펫에 밴 핏자국 외에는 범행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 가운데에 깔려 있는 카펫은 작고 네모난 인도산 제품이었고, 카펫이 깔려 있지 않은 바닥은 네모 모양의 나무판으로 짜여져 있었는데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 있었다. 벽난로 위는 무기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살인 흉기로 사용되었다. 창가에는 고급스러운 책상이 있었고, 그림들과 바닥 깔개, 벽에 걸려 있는 물건들 모두가 여성 취향의 사치스런 것들뿐이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말을 꺼냈다. “파리에서 보낸 소식은 읽었나요?” 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프랑스 경찰이 사건 해결에 큰 공로를 한 것 같군요. 사건이 그들이 말한 대로라는 게 명백하지 않습니까? 푸르네이 부인은 남편의 행방을 찾아내어 급습을 한 겁니다. 루카스는 완벽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눈이 의 식되어, 루카스는 부인을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겠죠. 길거리에 세워둘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녀는 남편의 뒤를 밟았다고 말하며 그를 비난했을 겁니다. 그러다 감정이 격해져서 가까이 있는 단검을 뽑아들었고, 결국은 죽인 겁니다. 하지만 의자들이 모두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던 걸로 봐서는 순간적으로 죽인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루카스는 의자 다리를 움켜쥔 채 죽었는데, 그건 그 의자로 부인의 공격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치 현장에서 범행을 목격한 것처럼 이제는 모든 게 분명해졌군요.” 홈즈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럼 나를 왜 오라고 했습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 좀 다른 문제입니다. 별일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제 생각에는 선생이 흥미를 가질 것 같아서……. 주요 사실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게 뭡니까?” “이런 범행이 일어난 뒤에는 일반적으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밤낮으로 경관이 사건 현장을 지켰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 루카스의 시신도 묻었고, 수사도 종결되어서 현장을 치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카펫을 보세요. 바닥에 고정시키지 않은 채 그냥 깔려 있거든요…….” “그래서요? 뭘 발견했습니까?” 홈즈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긴장되었다. “아마 백 년이 걸려도 홈즈 씨는 우리가 발견한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요. 카펫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보이지요? 틀림없이 피가 많이 스며들었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카펫에서 스며 나왔을 피가 바닥에는 묻어 있지 않단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놀라셨지요?” “핏자국이 없다고? 그럴 리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핏자국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레스트레이드는 카펫의 한쪽 귀퉁이를 손으로 들어 뒤집어 보였다. 그가 말한 대로였다. “보세요. 카펫의 뒤쪽도 앞쪽과 마찬가지로 핏자국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닥에도 얼룩이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스트레이드는 유명한 탐정을 당황하게 만들어서 신이 났는지 혼자서 킥킥 웃어댔다. “자, 그럼 제가 설명하지요. 여기 바닥에 두 번째 핏자국이 있습니다. 물론 카펫에 난 자국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지만요. 직접 보십시오.” 레스트레이드는 설명하면서 카펫의 다른 쪽을 들어 뒤집었다. 바닥 표면에는 선명하게 붉은 핏자국이 나 있었다. “홈즈 씨, 이걸 어떻게 생각하나요?” “왜 이렇게 되어 있는지 묻는 겁니까? 그거야 간단하지요. 처음에는 두 개의 핏자국이 일치했겠지만 누군가 카펫을 돌려놓은 거요. 모양이 네모난 데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으니까 쉽게 돌려놓을 수 있었을 거요.” “카펫을 돌려놓았다는 사실을 들으려고 홈즈 씨를 부른 게 아닙니다. 경찰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요. 그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내가 알고 싶은 건 누가, 무슨 이유로 카펫의 위치를 바꿔놓았냐 하는 점입니다.” 홈즈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로 봐서, 그가 흥분 때문에 마음속으로 동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 복도에 서 있는 저 경관이 계속 이 방을 지키고 있었나요?” “그렇소.” “그럼 내 말대로 하세요. 저 경관을 조사해야 해요. 우리 앞에서는 안 돼요.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뒤쪽 방으로 데려가세요. 당신과 일 대 일로 말해야 경관이 쉽게 털어놓을 거요. 그리고 왜 낯선 사람을 사건 현장에 들여보내고 혼자 놔두었는지 물어보세요. 그렇게 했는지 안 했는지를 묻지는 마세요. 그걸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해요.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하고, 빨리 털어놓으라고 다그치세요.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만이 용서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세요. 내가 말한 그대로 하세요. 알았지요?” “저 경관이 정말 알고 있다면 불지 않고는 못 배길 거요.” 레스트레이드는 복도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뒷방에서 그의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야, 왓슨. 어서!” 홈즈가 아주 급한 듯이 소리쳤다. 홈즈의 무관심한 태도 뒤에 감추어져 있던 무서운 힘이 폭발한 것 같았다. 그는 바닥에서 카펫을 걷어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 엎드려 네모난 마루 판자의 모서리 끝을 하나하나 손톱으로 잡아당겨 보았다. 그 런데 판자 중 하나가 조금 움직이는가 싶더니 마침내 상자 뚜껑처럼 열렸다. 판자 밑에는 검은 구멍이 조그맣게 나 있었다. 홈즈는 구멍에 손을 넣었다가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신음 소리를 내며 손을 꺼냈다. 구멍 속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왓슨, 빨리 서둘러! 원래대로 해놓아야 해!” 마루 판자를 제자리에 끼어놓고 카펫을 똑바로 깔았을 때 복도에서 레스트레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감이 들어왔을 때, 홈즈는 벽난로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오는 하품을 참기 어렵다는 듯 나른하게 서 있는 폼이 수사 같은 건 완전히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홈즈 씨,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번 일에는 그다지 흥미를 못 느끼시는 것 같네요. 그건 그렇고, 이 친구가 모두 실토했습니다. 들어와, 맥퍼슨. 이분들께 자네가 저지른 짓을 말씀드리게.” 흥분한 듯 보였지만 반성의 빛이 역력하게 보이는 경관이 방으로 들어왔다. “절대로 피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어떤 젊은 여자가 찾아왔죠.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죠. 온종일 방만 지키고 있자니 하도 심심해서요.” “그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여자는 신문에서 사건에 대해 읽었다고 하면서 범행 장소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단정한 차림에 말씨도 점잖아서 잠깐 보여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카펫에 난 핏자국을 보더니 바닥에 쓰려져서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거예요. 얼른 물을 가져와서 먹여보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길모퉁이를 돌면 있는 아이비 플랜트로 브랜디를 사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제가 돌아와 보니 여자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갔는지 없었습니다. 부끄러워서 제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 그냥 간 거라고 생각했죠.” “이 카펫 위치가 바뀐 것 같진 않았소?” “그게…… 제가 돌아왔을 때 약간 구겨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가 그 위에 쓰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반들반들한 바닥에 그냥 깔려 있지 않습니까? 고정시키는 것도 없고요. 그래서 다시 반듯하게 펴놓았습니다.” “나를 속이진 못한다는 걸 알았겠지, 맥퍼슨?” 레스트레이드가 엄하게 말했다. “임무를 좀 게을리 해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카펫을 보기만 해도 나는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네. 없어진 게 없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는 굉장히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거야. 홈즈 씨, 별일도 아닌 걸로 여 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바닥에 난 두 번째 핏자국이 첫 번째 핏자국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 점에 선생이 흥미를 가질 것 같았습니다.” “확실히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사실이죠. 그런데 맥퍼슨 경관, 그 여자가 온 건 한 번뿐이었소?” “네, 한 번뿐입니다.” “이름은?” “이름은 모릅니다. 타이프를 칠 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왔다는데, 주소를 잘못 찾았다고 하더군요. 상냥하고 품위도 있는 젊은 여자였습니다.” “키가 크고 미인이었나요?” “네, 아주 날씬한 여자였습니다. 미인이냐고 물으셨지요? 굉장한 미인이었습니다. 그런 미인이 ‘경관님, 잠깐만 보여주세요.’라고 제게 말하더군요. 상냥하고 애교까지 섞인 말투여서 마음이 흔들렸죠. 그리고 문간에서 잠깐 들여다보게 해줘도 크게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옷차림은 어땠소?” “수수한 차림이었습니다. 발까지 내려오는 긴 망토를 입고 있었어요.” “여자가 찾아온 게 몇 시경이었소?” “해가 질 무렵이었습니다. 브랜디를 사들고 돌아올 때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으니까요.” “잘 알겠소. 왓슨, 빨리 가야겠어. 다른 데 중요한 볼일이 있어.” 우리가 집을 나올 때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그대로 방에 남았고, 맥퍼슨 경관 혼자서 우리를 문까지 배웅했다. 홈즈는 계단에 서서 뒤를 돌아다보더니 손에 있는 뭔가를 경관에게 보여주었다. 경관은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아니, 이럴 수가!” 홈즈는 아무 말 말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상의 주머니에 다시 그것을 집어넣었다. 거리로 들어서자 홈즈는 웃음을 터뜨렸다. “잘됐어! 왓슨, 이제 마지막 장면을 위한 막이 올라가고 있어.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거고, 트렐로니 호프 장관의 화려한 경력에 오점이 생기는 일도 없을 거야. 편지를 보낸 국왕도 자신의 경솔한 처신에 대해 처벌받을 필요가 없어. 우리가 약간의 재치를 발휘해 잘 처리한다면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아.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 던 사건이 이렇게 해결되다니……. 자네도 안심이 되지?” 내 마음은 홈즈의 비상한 능력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 차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자네, 사건을 해결했군!” “완전히 해결한 건 아니야. 아직 확실치 않은 점이 몇 가지 있어. 하지만 많은 걸 알았으니, 나머지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거지. 곧장 호프 장관 댁으로 가서 사건을 완전히 해결하자고.” 호프 장관 집에 도착했을 때, 홈즈는 호프 장관의 부인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거실로 안내되었다. 부인은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홈즈 씨, 이건 너무 부당하고 가혹한 짓 아닌가요? 제가 당신을 찾아간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드렸을 텐데요. 제가 주제넘게 나선다고 제 남편이 생각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절 찾아와서 우리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시면 제가 난처해지지 않겠어요?” “부인, 유감스럽게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아주 중요한 편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저한테 그 편지를 내주시지요.” 부인이 벌떡 일어섰다. 아름다운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셨다. 눈앞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나는 부인이 기절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부인은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나 기운을 차렸지만, 얼굴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놀라움과 노여움의 빛이 서려 있었다. “홈즈 씨, 당신은…… 당신은 나를 모욕하는군요.” “이러지 마세요, 부인. 소용없는 짓입니다. 편지를 그만 내놓으세요.” 부인은 벨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집사가 집 밖까지 안내할 겁니다.” “벨을 울리면 안 됩니다. 벨을 울리면 소문을 내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던 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갑니다. 편지를 내놓기만 하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수습될 겁니다.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제가 잘 수습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 말에 따르지 않으신다면 저로서는 진상을 밝힐 수밖에 없습니다.” 부인은 마치 여왕처럼 오만하게 서서 똑바로 홈즈의 눈을 응시했는데, 홈즈의 마음을 읽으려는 것 같았다. 한쪽 손을 벨 위에 올려놓고 있긴 했지만 누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홈즈 씨, 절 위협하는군요. 여기까지 와서 여자를 위협하다니, 남자답지 않은 짓 아닌가요? 뭔가 아신다고 했는데, 뭘 아신다는 거죠?” “먼저 앉으세요, 부인. 그렇게 서 계시다가 자칫 쓰러질 경우 상처를 입을 겁니다. 앉으실 때까지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좋아요, 홈즈 씨. 5분만 시간을 드리지요.” “고맙습니다. 1분으로도 충분합니다. 힐다 부인,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부인이 에두아르도 루카스를 찾아간 것도, 그에게 편지를 건네준 것도, 어제 저녁 교묘한 방법으로 루카스의 방에 다시 들어간 것도……. 그리고 카펫 아래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편지를 어떻게 꺼내갔는지도 말입니다.” 부인은 백짓장같이 하얀 얼굴로 홈즈를 빤히 쳐다보다가, 두 번쯤 침을 삼키고는 말문을 열었다. “홈즈 씨, 당신 미쳤나 보군요. 미쳤어요!” 홈즈는 상의 주머니에서 두껍고 딱딱한 종이 조각을 꺼냈다. 어떤 여자의 초상화에서 얼굴만 도려낸 것이었다. “쓸 데가 있을 것 같아 이걸 갖고 다녔죠. 경관이 어제 저녁에 온 여자와 이 초상화 의 여자가 같은 인물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부인은 깜짝 놀라 숨이 막힌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의자 등에 기댔다. “자, 부인은 편지를 갖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건을 잘 수습할 수 있어요. 저도 부인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편지를 찾아 당신 남편에게 돌려주기만 하면 제 임무는 끝납니다. 제 말대로 하세요. 이제 다 고백하세요. 기회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부인은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홈즈 씨,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 말에, 홈즈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유감입니다, 부인. 저는 부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헛수고였군요.” 홈즈가 벨을 울리자, 잠시 후 집사가 들어왔다. “트렐로니 호프 장관은 집에 계십니까?” “12시 45분에 돌아오실 겁니다.” 홈즈는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아직 15분이 남았군. 됐소, 그만 가보세요. 장관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집사가 방문을 닫기도 전에 호프 부인은 홈즈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손을 뻗었다. 위를 올려다보는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절 용서하세요, 홈즈 씨. 용서하세요! 제발 남편에겐 말하지 마세요. 저는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합니다. 저는 남편의 삶에 어떤 나쁜 영향도 끼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남편의 고귀한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될 겁니다.” 부인은 몹시 흥분한 상태로 애원하듯이 말했다. 홈즈가 부인을 일으켰다. “부인,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별로 시간이 없어요. 편지는 어디에 있나요?” 부인은 책상으로 뛰어가 열쇠로 서랍을 열더니 푸른빛이 도는 긴 봉투를 꺼냈다. “여기 있어요, 홈즈 씨. 이런 건 애당초 내 눈에 띄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걸 어떻게 돌려주지? 빨리 무슨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문서 보관함은 어 디 있나요?” 홈즈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직 침실에 그대로 있어요.” “정말 다행이군요. 부인, 문서함을 빨리 가져오세요.” 잠시 후 부인이 붉은색의 납작한 문서함을 갖고 돌아왔다. “먼젓번에는 어떻게 열었죠? 복제한 열쇠를 갖고 있나요? 물론 갖고 있겠죠? 어서 여세요.” 호프 부인은 품안에서 조그만 열쇠를 꺼냈다. 문서함은 쉽게 열렸다. 안에는 서류가 가득 들어 있었다. 홈즈는 파란 봉투를 서류 중간에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문서함을 닫고 열쇠로 다시 잠근 다음, 침실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이제 호프 장관을 맞을 준비가 다 됐군요. 아직 10분이 남았습니다. 제가 부인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아시겠죠? 그러니 그 보답으로 부인은 이 사건의 진상을 숨김없이 얘기해 주셔야 합니다.” “홈즈 씨, 다 말하겠어요. 남편의 마음을 한순간이라도 괴롭히느니 차라리 제 오른팔이 잘리는 게 나을 겁니다. 런던에서 저만큼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도 저는 이런 짓을 저질러야만 했어요. 남편이 제가 한 일을 안다면 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워낙 명예를 중시하는 분이라 남의 잘못을 잊거나 용서하지 않거든요. 홈즈 씨, 제발 도와주세요! 제 행복, 남편의 행복 그리고 저희들 생활 전체가 위험에 빠져 있어요.” “빨리 사건의 진상을 말하세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사건은 제가 경솔하게 쓴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결혼 전에 사랑에 빠진 한 소녀가 충동적으로 쓴 철없는 편지였지요. 저는 별 뜻 없이 쓴 편지지만, 만약 그것이 알려지면 남편이 제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할 것 같았어요. 남편이 그 편지를 읽어본다면 다시는 저를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 편지를 쓴 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어요. 전 완전히 잊혀진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루카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그 편지를 자기가 갖고 있는데, 남편에게 보여주겠다고 협박을 했어요. 저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었지요. 그랬더니 그는 남편의 문서함에 들어 있는 이러이러한 편지를 넘겨주면 내 편지를 돌려주겠다고 했어요. 정부 기관에 스파이를 잠입시켜 그런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거예요. 그는 남편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어요. 홈즈 씨, 제 처지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요?”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어야 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었어요. 홈즈 씨, 그건 안 되는 일이었어요! 두 가지 선택이 있었죠. 하 나는 남편과 제 사이가 끝나는 것이고, 하나는 남편의 편지를 훔치는 거였어요. 물론 나쁜 짓 같긴 했지만, 정치에 관한 일이라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제가 잘 몰랐던 거예요. 사랑과 신뢰라는 문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제 결론은 확실해졌어요. 루카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심했죠. 제가 남편 열쇠의 본을 뜨고, 루카스가 열쇠를 복제해 주었어요. 그런 다음 저는 문서함을 열고 편지를 꺼내서 고돌핀 가로 가져갔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미리 정한 대로 저는 현관문을 두드렸어요. 루카스가 직접 문을 열어주더군요. 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현관문은 열어 두었습니다. 루카스와 둘이서만 있는 게 무서웠거든요. 제가 안으로 들어갈 때 웬 여자가 밖에 서 있었던 기억이 나요. 우리 거래는 금방 끝났어요. 저는 그에게 제가 가져온 편지를 넘겨주었고, 루카스도 제 편지를 넘겨주었죠. 그런데 바로 그때 문간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죠. 루카스는 재빨리 카펫을 젖히고 그 밑에 있는 비밀 장소에다 편지를 넣고는 다시 카펫을 덮었어요.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악몽 같았어요. 지금도 그 여자의 가무잡잡한, 미친 듯한 얼굴이 눈에 선해요. 그 여자는 프랑스어로 ‘내가 지금까지 이날을 기다려왔다. 드디어 여자와 같이 있는 현장을 잡았어!’라고 외치더군요. 그러고 나서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졌어요. 루카스가 의자를 들어올리려고 했고, 여자의 손에는 단도가 번쩍였어요. 거기까지 보고 저는 그 무서운 곳에서 정신없이 도망 쳐 나왔어요. 다음 날 아침에 신문을 보고서야 루카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죠. 전날 밤까지만 해도 저는 행복했어요. 제 편지를 찾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죠. 한 가지 불행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불행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다음 날 아침이었어요. 편지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면서 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제가 저지른 짓을 고백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 과거까지 털어놓아야 했어요. 그건 안 될 일이었죠. 그래서 저는 당신을 찾아갔어요. 제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었거든요. 사실을 확인하고, 저는 남편의 편지를 되찾아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어요. 편지는 아직 루카스가 숨겨두었던 장소에 그대로 있는 게 분명했어요. 그 무서운 여자가 방 안에 들어오기 전에 숨겨둔 거니까요. 그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루카스가 어디에 편지를 숨겨둘지 몰랐을 거예요. 그 방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틀 동안 그 집을 살펴보았지만 한 번도 현관문이 열려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제 저녁에 마지막 시도를 해봤죠. 제가 어떻게 해서 그 방에 들어가 편지를 갖고 나왔는지는 당신도 이미 알고 계시죠? 저는 편지를 갖고 돌아와 그걸 없애 버릴까도 생각했어요. 남편에게 돌려주면 제가 한 잘못을 다 털어놓아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어쩌면 좋아! 계단을 올라오는 남편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요!” 호프 장관은 흥분해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홈즈 씨, 무슨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나요?” “사건 해결의 희망이 보입니다.” 호프 장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고맙기도 해라! 저와 점심 식사를 하려고 수상께서 함께 오셨소. 그분에게 희망이 보인다는 얘기를 해도 될까요? 수상은 강철처럼 강인한 분이지만, 이번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 때문에 밤에 한숨도 못 주무신 것 같소. 제이콥스, 수상께 이쪽으로 오시라고 전해 주게. 여보,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까 당신은 자리를 좀 피해 주겠소? 식당에서 기다리면 우리도 곧 가리다.” 벨린저 경의 태도는 침착했지만, 눈빛이 번뜩이고 뼈만 남은 손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호프 장관과 마찬가지로 흥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보고할 게 있다고요, 홈즈 씨?” “지금까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편지가 있을 만한 곳은 모두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찾을 수 없는 걸로 봐서는 우려하셨던 위험은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소, 홈즈 씨.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안은 채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소? 우리는 뚜렷한 단서가 필요하오.” “그런 단서를 입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온 겁니다. 이 사건을 파헤쳐볼수록 편지가 이 댁에서 나가지 않았다는 확신이 듭니다.” “홈즈 씨! 그게 무슨 소리요?” “편지가 이 댁에서 나갔다면 지금쯤은 공개되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편지를 훔쳐낸 다음 집 안에 숨겨둔다는 것이 말이나 되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저는 아무도 편지를 훔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 편지가 문서함에서 왜 없어졌다는 거요?” “문서함에서 없어진 것인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홈즈 씨,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요. 문서함에서 없어졌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소.” “화요일 아침 이후에 문서함을 살펴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럴 필요가 없었소.” “편지를 못 보고 넘어간 건 아닐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하지만 저는 확신할 수 없군요. 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문서함에는 다른 서류들도 들어 있겠죠? 그럼 다른 서류와 뒤섞여서 못 보신 게 아닐까요?” “제일 위에 두었소.” “누군가가 상자를 흔들어서 위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그럴 리가 없소! 모두 꺼내 보았단 말이오.” 벨린저 경이 끼어들었다. “호프 장관, 그거야 쉽게 해결될 문제 아니요? 문서함을 가져오라고 하시오.” 호프 장관이 벨을 울렸다. “제이콥스, 문서함을 가져오게. 말도 안 되는 시간 낭비이긴 하지만, 홈즈 씨가 믿지 않으니 조사를 해보지요.” 얼마 후, 제이콥스가 문서함을 가져왔다. “수고했네, 제이콥스. 여기에 놔두게. 열쇠는 항상 제 시곗줄에 달려 있습니다. 자, 이게 서류들입니다. 메로우 경에게서 온 편지, 찰스 하디 경의 보고서, 베오그라드에서 보낸 각서,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곡물세에 대한 문서, 마드리드에서 온 편지, 플라워스 경의 편지……. 아니! 이럴 수가! 이게 뭐야? 벨린저 경이라고!” 벨린저 경은 호프 장관의 손에 있는 푸른 봉투를 낚아챘다. “이거야!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도 그대로군. 호프 장관, 천만다행일세.” “고맙소! 정말 고맙소! 이제야 걱정이 사라졌군. 그렇지만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린 줄 알았는데……. 홈즈 씨! 당신은 마법사요, 마법사! 그런데 편지가 문서함 안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다른 곳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정말 내 눈을 믿을 수 없군!” 호프 장관이 문 쪽으로 달려갔다. “내 아내가 어디 있지.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되었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힐다! 힐다!” 계단 아래에서 호프 장관의 부인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린저 경은 눈을 반짝이면서 홈즈를 바라보았다. “홈즈 씨, 편지가 문서함 속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한 데는 무슨 이유가 더 있었을 텐데요. 이 편지가 어떻게 해서 돌아와 있는 거요?” 홈즈는 빤히 쳐다보는 벨린저 경에게서 눈길을 떼며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게도 외교상의 비밀이 있습니다.” 홈즈는 모자를 집어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